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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가수

김현식 부인(아내) 사망원인

우유와 탄산 2020. 12. 13.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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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김현식은 레전드 가수로 불리며 그의 노래는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김현식을 매년 추모하고 있는 가수들이 많이 있고, 그의 노래를 리메이크하는 동료 가수들도 많이 있습니다.


김현식 프로필

김현식 나이는 1958년 2월 18일생입니다. 김현식 키는 171cm이며, 김현식 학력은 명지고등학교 중퇴입니다. 김현식 고향은 충청남도 홍성군이며 사망은 1990년 11월 1일입니다.



김현식은 한국의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린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당시 동아기획에 소속된 뮤지션들과 함께 당대 음악을 크게 발전시켰고 흥행한 인물이지요. 김현식은 최고의 인기를 누린 대한민국 가요역사의 레전드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김현식 어린시절

김현식은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김현식 아버지는 사업가로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김현식 할아버지 역시 충남 홍성의 유지였다고 하지요. 외할아버지는 만석꾼의 아들이었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영문학자였습니다.



김현식은 보성중학교를 다닐 때에 처음으로 기타를 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로 인하여 공부를 멀리하게 되고 부친의 사업 실패로 한동안 방황을 하게 되지요.


김현식은 고등학교를 자퇴한 후 검정고시 학원에서 고등학교 학력을 졸업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종로에 있는 한 음악 다방에서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가수의 꿈을 키웠지요.



당시 김현식이 음악다방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이 때 DJ가 20대 중순이었던 개그맨 전유성이었습니다. 전유성은 김현식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감탄을 했다고 하지요.


<넌 음악다방 같은 곳에서 노래를 부르는 게 아까워. 그야말로 가수로 나가면 전설이 될까야>라며 적극적으로 가수가 되길 권했습니다.


이후 밤무대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통기타를 연주했고 이때부터 언더그라운드에서 주목받는 신인으로 인기를 끌게 되지요.


김현식은 1978년 1집 앨범을 녹음만 해둔 채로 놔두야 했습니다. 김현식의 앨범을 주선으로 만들려고 했던 이장희가 미국으로 떠났고 김현식 본인도 대마초 문제로 앨범 녹음을 미뤄야 했기 때문이지요.


결국 김현식은 1980년에 자신의 이름을 건 데뷔 앨범 1집 앨범 봄여름가을겨울을 내지만 이것이 실패를 했고, 이후 술과 담배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내를 만나게 되지요.



김현식 아내(부인) 아들 김완제

김현식은 1집 앨범 실패 후 스스로를 비관하며 술과 담배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때 신촌 옷가게의 여인에게 반하게 됩니다.


결국 1982년 결혼을 했고 자신이 분신이라고 부르며 사랑을 하던 아들 김완제를 얻게 되지요. 그리고 밤무대 가수로 활동을 하면서 1984년에 발매했던 2집앨범 <사랑했어요>가 대박 인기를 얻으면서 가수로 자리를 잡는데 성공을 하게 됩니다.

그 후 동아기획에서 백밴드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제작한 <비처럼 음악처럼>이 30만장 넘게 팔리며 상업적 성공과 흥행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김현식은 1987년 전인권 허성욱과 함께 또다시 대마초를 피우다가 구속되며 피폐해져갔지요. 김현식은 1988년 다시 재기 콘서트를 열었고, 그해 9월 4집 앨범을 발표하며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김현식은 가수로서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었지만 가수 활동 중에 폭력과 대마초를 피워 자신을 스스로 망가뜨렸던 것 같습니다.



김현식 사망원인

김현식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술과 담배를 누구보다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 도가 지나쳐 알코올중독의 지경까지 오게 됩니다. 1987년 11월 1일 친한 후배가수였던 유재하가 교통사고로 죽게 되는데 당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김현식은 한동안 술에 매달리며 슬퍼했다고 합니다.


당시 친한 지인들은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왜 술을 먹냐?>라고 걱정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술을 들이켰다고 합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자 김현식의 건강은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했지요.


1989년 <비 오는 날의 수채화>를 녹음할 때부터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1990년 5집 앨범을 발표할 당시 의사가 술을 한 방울이라도 마시면 죽는다고 경고할 정도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 김현식은 자신의 집에서 술과 담배만 했고 밥도 먹지 않고 지냈다고 합니다. 결국 간경변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지요. 문제는 병원 입원 후에도 탈출후에 술을 마셨고 자기 몸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습니다.


결국 김현식은 1990년 11월 1일 절친했던 후배 유재하의 기일에 자신의 자택인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렉스아파트에서 간경화로 사망하게 됩니다.


동아기획 김영 사장은 전날 각혈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그가 세상을 그리 빨리 뜰 줄은 몰랐으며, 사망 당일 2시간 전에 김현식이 전화로 <사장님 저 괜찮으니까 오늘 퇴원해서 내일 녹음에 들어가야겠어요>라면서 밝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김현식은 사후 유작인 <내 사랑 내 곁에>는 100만장 넘게 팔리는 인기를 끌었으며, 실질적인 유작이라고 할 수 있는 5집 앨범이 병원에서 외출을 다녀오다시피해서 간신히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김현식 내 사랑 내곁에

김현식의 6집 앨범 <내 사랑 내 곁에>는 세상을 등진 후 1991년에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이 곡은 신예 작곡가 오태호가 만든 곡입니다. 이 곡은 언더그라운드 록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오태호가 누구를 주려고 만든 노래가 아니라 연습실에서 기타를 치며 흥얼거리던 습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우연히 들은 김현식이 자신에게 노래를 달라고 부탁해서 김현식의 6집에 수록이 되었고, 이 곡에 큰 히트를 치게 되지요. 이후 오태호도 발라드 전문 작곡가로 변신하게 됩니다.


김현식이 지금도 레전드 가수라고 불리며 회자되는 이유는 사후 유작 <내 사랑 내 곁에>의 엄청난 흥행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곡 자체도 워낙 좋지만 김현식의 애절한 목소리를 만나 더욱 멋진 곡을 만들어냈지요.



1996년에는 김현식 7집 앨범이 발매가 되기도 했는데 김현식이 간경화로 병상에서 즉흥으로 녹음한 노래들 중에서 미발표된 노래들로 구성된 앨범입니다. 2002년에도 통기타 반주로 녹음한 미발표 곡들을 모은 스페셜 앨범이 발매가 되었지요. 그만큼 사후에도 김현식의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김현식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던 것 같습니다. 술과 담배를 멀리하고 조금만 더 건강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김현식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더 많은 명곡을 만들어냈을 것이며 한국 가요계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현식은 가수 활동을 하면서 두 번이나 대마초 혐의로 구속이 되었고, 여러 고통을 술과 담배로 해결하며 미성이던 음색도 허스키하게 변했습니다.


하지만 김현식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는데요. 자신의 바뀐 음색마저 장점으로 승화시키며 노래에 담아내던 천재 보컬리스트였습니다. 죽음 앞둔 순간까지 자신에게 남은 모든 힘을 쥐어 짜서 노래를 부르던 김현식. 그의 노래가 오랫동안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불려지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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