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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빠이로 유명한 이상용. 이상용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우정의 무대>입니다. 요즘 10, 20대들은 잘 모를 수 있는 프로그램이지만 한 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예능 프로그램이지요.



<우정의 무대>는 MBC에서 방영된 TV 프로그램으로 군인 대상의 프로그램입니다. 1989년 4월 22일 첫 방송을 시작하여 1997년 3월 2일까지 방영이 되었고, 초대가수나 연예인들도 참여했고 군인 위문의 특성상 여성 가수들도 대다수 참여를 했습니다. 군인들이 장기자랑으로 휴가증을 얻는 코너가 있었지요.


<우정의 무대>를 통하여 진행자인 이상용은 전국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는데요. 그리고 주제곡인 <그리운 어머니>도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상용 프로필

이상용 나이는 1944년 4월 2일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상용 나이는 올해 71살이지요. 이상용 학력은 대전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임학과, 중앙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석사를 나왔습니다. 이상용 데뷔는 1973년 MBC <유쾌한 청백전> 게스트로 데뷔를 하게 됩니다.


이상용은 이후 방송 진행자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모이자 노래하자>라는 어린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어린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고 <우정의 무대>로 군장병들과 전국민의 인기를 얻게 되지요.


이상용은 뽀빠이로 잘 알려져 있지만, 어렸을 때에는 미숙아로 태어날 정도로 약하게 태어났다고 하지요. 10살이 될 때까지 20가지가 넘는 병을 치뤘을 정도로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었다고 하지요.



이상용의 키는 프로필상 160cm인데요. 160cm도 안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에 너무 약하게 태어났고, 제대로 먹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약한 모습 때문에 이상용은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상용은 스스로 자신의 몸을 단련하며 뽀빠이의 이미지를 가지게 됩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삼촌이 아령을 사다줬다. 머시매는 몸이 건강해야 해. 그래야 넘들이 얕보지 않는 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운동을 했다. 고 1이던 60년 미스터 대전고에 출전해 인기상을 탔다. 이듬해는 미스터 충남에 도전해 또 인기상을 받았다. 앞가슴 근육을 키우고 몸 만들기에 열중했다. 고3이던 62년 드디어 미스터 대전고에 뽑혔다>


이상용은 고려대학교에 입학해서 응원단장까지 하게 되는데요. 비록 키는 작았지만 보통 학생들의 인기 자리인 응원 단장까지 맡게 되었고, 고대 ROTC가 되어 장교가 될 훈련까지 받았습니다. 미숙아로 태어나 약한 학창 시절을 보내며, 스스로 노력하여 건강한 몸을 만들고 남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 이상용이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축제의 단골솔님으로 불리며 나는 키는 작아도 박력과 유머 넘치는 응원 단장이었다. 1960년대 여대생들이 나를 모르면 간첩이던 시절이었다>


이상용 부인(아내) 윤혜영

이상용 부인 윤혜영은 이상용보다 1살 연상으로 어릴 적 죽마고우 누나 친구였다고 합니다. 이상용은 아내가 된 윤혜영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을 하기도 했습니다.


<맘씨 좋고 인정 많은 혜영 누나는 나를 친동생처럼 귀여워했다. 연애 편지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고 귀찮게 하는 남자가 있으면 체격 좋은 동생이 있다며 겁을 줬다>



<사랑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일까 오누이처럼 붙어다니던 어느날인가 내 눈빛은 변해 있었다. 수다를 떨며 생기 발랄하게 웃는 그녀를 훔쳐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 속으로 빠져들다가 그녀와 눈빛이 마주치면서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이상용의 사랑은 시작이 되었고, 마침내 이상용은 윤혜영과 결혼을 성공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그녀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집안도 변변치 못하고 출세길도 보이지 않는 키작은 사위를 반길리 없었다. 아내는 나 하나만 믿고 보따리를 챙겼다> 이상용 윤혜영 부부는 1966년 3월 5일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상용 부인 윤혜영 키는 170cm로 늘씬한 키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고 알려졌는데요. TBC 3기 배우 출신이며, 신문사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재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결혼 후 이상용이 ROTC 군입대를 하게 되고, 부인은 이상용을 끝까지 기다리게 되지요.


이상용은 결혼 이후 뽀빠이로 우정의 무대 등 방송인으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다 큰 사건에 휘말리며 방송 활동에 큰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1996년 10월 27일 이상용이 프로그램 진행 도중 공금횡령에 연루되면서 경찰에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MBC는 이상용 하차 뒤에 1996년 11월 3일부터 2주 동안 특집 프로그램을 내보냈고 같은 달 17일부터 김병조로 진행자가 교체됩니다. 이후 이상용은 1997년 2월 무혐의로 풀려나며 이사건으로 프로그램이 종영되지요.


<1996년 11월 3일은 나에게 6.25 전쟁과 같은 날이다. 우정의 무대 화천 녹화가 끝나고 돌아온니 언론에 내가 아주 죽일놈으로 보도가 되었다. 심장병 어린이 수술 기금 횡령 혐의를 받고 있으며 벤츠 600을 타고 다니고 40억원짜리 집에서 살고 심장병 어린이를 한 명도 수술하지 않았다는 기사였다>


<너무나 억울했지만 나를 모함한 자가 언론을 쥐락펴락하고 있으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죽고 싶었다. 난 20년간 지프차를 타고 다니고 지금 살고 있는 40평짜리 빌라의 융자금은 작년에 상환이 끝났다. 그리고 1996년까지 25년간 수술 받은 심장병 어린이는 567명이었고 그중 13명이 생명을 잃었다>



<하루 아침에 방송에서 퇴출된 나는 집 밖을 못나갔다. 3개월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판결 결과는 어느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처음에 오보를 낼 때는 단 한 명의 기자도 내게 확인주차 하지 않고 썼으면서 말이다. 사람들은 내가 감옥에 간 줄로 알 것 아닌가 환장 할 것 같았다. 좋은 일 한다고 수술해주고 욕 먹고 나쁜 놈이 되고... 아버지는 내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돌아가셨다>


이상용은 이때의 충격으로 왼쪽 눈이 실명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상용의 공금 횡령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 판결로써 밝혀졌지만 이상용은 이미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이후 이상용은 미국으로 건너가 관광버스 가이드를 하면서 먹고 살았다고 하는데요. 이상용은 1년 만에 귀국하여 딸을 시집보내면서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 돕는 일은 다시는 안 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하지요.


당시 한국 언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욕심을 버린 이상용은 보답을 바라지 않도 아직도 남을 도우려 노력한다고 하는데요. 뽀빠이 이상용이 앞으로는 행복한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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